읽을거리/내 생각, 내 마음

금강 길 홀로 걷기 기행문 4

허니강 2014. 4. 29. 12:30

걸음아, 걸음아 나와 함께 떠나자

(금강 길 홀로 걷기 기행문 4)

강헌희

- 옛 도시 <공주>는 언제 가 보아도 마음이 포근하다 -

언제 다시 가 보아도 옛 정취가 흠뻑 서려있는 <공주>는 내 인생의 굵은 줄거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추억의 도시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투숙했던 모텔 방에서 노곤해진 몸의 피로를 풀고 동창에 햇빛이 환하게 번질 때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강변길을 따라 좀 걸어 내려가니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허허벌판이었던 금강다리 건너편 신관동이 그야말로 환골 탈퇴하여 실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 나의 모교인 <공주 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도 이제는 인생 후반전에 접어들면서부터 슬그머니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와보랴’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느 여행길에서나 구석진 곳까지 샅샅이 들여다보려고 하다 보니 동행자들에게 불편을 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의 중고등학교 교정보다도 못했던 70년대 초반의 초라했던 대학 캠퍼스는 외형상으로만 보더라도 눈부신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당시에 서너 채에 불과하던 강의동이나 부속 건물이 40여 채로 불어나 있다. 아마도 후배 대학생들의 학구 열의도 그에 못지않을 거라고 기대해 보고 싶다.

 

대학 구내매점에 들어가 가난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서 그 당시에는 일반화되지 않았던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대신하였다.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가씨는 내가 마치 밤새워 논문 쓰느나고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교수님으로 착각해서인지 공손한 자세로 친절하게 시중을 들어 주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들어갈 때는 대학교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버젓이 정문으로 나오려다 보니 기분이 좀 묘하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해서 인근의 <PC방>을 찾아 들어가 지인들에게 보낼 ‘여행 기행문’을 써 보려고 했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아있는 녀석들은 <게임>을 즐기느나 시시덕거리고, 옆에 앉아있는 녀석들은 열나게 <시국 토론>하느나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나는 아까운 돈 써가며 시간만 낭비했을 뿐 영영 내 머리 속을 떠나버리기 전에 서둘러 붙들어 두어야 할 갖가지 상념들을 제대로 정리해 볼 수가 없었다.

 

<PC방>을 나와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면서 늦은 아침 식사에 빠른 점심으로 칼로리 에너지를 충전하기로 하고 가장 흔한 상호라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만리장성’ 중화 요리점에 들어가 짜장면 한 그릇을 홀라당 비워냈다.

 

- 자, 그럼 또다시 행군해보자. 내 사랑하는 두 다리 근육과 발바닥이여! -

수난의 백제 유적 중 하나인 <공산성>이 눈앞에 훤히 보인다. 갑옷 입고 망루에 올라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장수와 노역에 동원되어 온몸에 땀 삘삘 흘려가며 고통스럽게 성벽을 쌓아 올리는 흰옷 입은 백성들의 모습이 내 상상의 눈에 오버랩 되어 보여 지는 듯하다.

옛날에는 끝없이 넓은 백사장이 이어지던 자리에 지금은 아주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인공의 ‘시민 위락 공원’ 시설이 들어 서있다. 바로 그 자리에는 내가 대학시절에 들었던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떤 학우 하나가 친구들과 함께 신관동 캠퍼스에서 강의를 마치고 공주 시내의 하숙집으로 되돌아오는 중에 날씨가 무더워 잠시 땀을 씻을 생각으로 성급하게 강물에 뛰어 들었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변을 당하는 불행한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웠던 일은 그 당시에 그와 깊이 사귀던 사이의 여학생 친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몹시 애통해하면서 서글프게 울고 있더라는 소문이 지금도 잊히지 않고 내 귓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 후 그 여학생은 어떤 인생은 살아왔을까? 아마도 더 좋은 남자를 만나 아들, 딸 하나씩 낳아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