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내 생각, 내 마음

내 인생의 큰 스승님, 결국 지구를 떠나셨다

허니강 2014. 6. 23. 13:08

 

강헌희

어리숙한 내 삶의 등불과 같은 안내자가 되어 주시던 나의 큰 스승 길봉섭 박사님이 소천해 가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빛의 속도로도 쉽게 이를 수 없는 멀고 먼 우주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체 ‘엄마’라는 배에 태워졌다. 이어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자궁’이라는 보료에 쌓여 장장 280여일의 긴 항해 끝에 ‘탄생’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이 땅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우리는 아빠, 엄마의 친절한 보살핌을 받으며 양육되다가 어느 나이가 되면서부터 ‘사회’라는 복잡한 구조 속에 버려졌다. 이때부터 우리는 숱한 인생의 고난을 체험하고, 혼란을 방황한다.

 

그 무렵 나에게 손을 내밀어 ‘만남’이라는 인연의 끈을 당겨 주신 분이 바로 평생 동안 내 삶의 등불이 되어 주신 길봉섭 박사님이셨다. 줄곧 내 앞에서 삶의 행로를 빠르고 부지런한 걸음으로 걸어가시던 그 분은 언제나 정신이 바르고 행동이 깔끔하셨다. 그러면서도 내면에 쌓인 인격의 향기는 항상 훈훈하게 주변의 차가움을 녹여주셨다.

 

내가 젊은 시절 과욕을 부려 직장과 공부를 겸하고 있을 때 나보다 훨씬 바쁘게 살아가시던 당신의 짬을 내어 내 어설픈 논문의 오류를 바로 잡아 보완해 주시던 일, 취미삼아 민속요법에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한의학’ 편입의 길을 권유해 주시던 일, 젊은 혈기에 무턱대고 몇몇 뜻있는 지인들과 시작한 초등학생 대상의 ‘자연탐구 캠프’ 활동에 해외 학술대회 참석으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강사료 없이 봉사해 주시던 일, 어느 해인가는 심각한 고관절통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어린 학생들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 하시며 가족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캠프 활동에 참여하여 지도해 주시던 일, 내가 가는 학교마다 변변치 못한 특강 답례에 상관치 않으시고 학생들에게 귀한 교훈의 말씀을 주신 일 등 나는 이제 그분의 후배로서, 제자로서 충분한 보답을 다하지 못하고,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업적을 남기시던 그분의 권위에 걸맞지 않게 값싸게 그분의 노고를 헐어 내는 불충의 죄를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새삼스레 ‘나는 다시 이 땅에 태어나도 학문의 길을 가겠다’고 천명하셨던 그분의 숭고한 사명의식을 감히 본받을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이 한탄스럽다.

평생을 제자들 앞세우며 지구의 표면에 식생하는 생명체들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정리하시는 일에 매진하시고도 말년에 급격하게 나빠진 정신적, 육체적 피폐를 결코 숙명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으시면서, 가끔씩 나에게 전화를 걸어 ‘강선생, 모악산에 노박덩굴이 꽃을 피웠을텐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 ‘러시아의 바이칼호 주변 학술 탐사에 함께 참여해 보지 않겠느냐?’ ‘전주천 식생조사는 언제 시작 할 거냐? 도청에서 지원해 주지 않으면 우리 호주머니 돈이라도 털어서 하자’는 등의 꺼질 줄 모르는 학문의 열기를 불태우시던 그분의 음성을 이제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어 한스럽다.

 

어느 날 맘먹고 시간을 내어 중병으로 요양 중이시던 댁을 찾아 문병을 갔더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하여 휠체어에 의지해 계시면서도 열심히 신문 쪼가리를 스크랩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저 분은 하늘나라에 가실 때도 옆구리에 책 보따리를 끼고 가시려나’하고 실소하는 실례를 범하였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그 분의 신체를 내 자동차에 모시고 야외로 바람을 쐬러 가시던 중에도 열심히 주변 식물들에게 관심을 갖으시면서 쪽지에 메모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는 ‘저 분은 나중에 하느님 앞으로 불려 가시면 아마도 자랑스런 ’지구 생활 모범 소명상‘쯤은 능히 받아 내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통하다. 참으로 애통하다. 내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용기를 주시던 내 인생의 고귀한 멘토를 잃게 되어 슬프다. ‘나도 세상을 저 분처럼 후회 없이 살아가야지’ 하는 삶의 귀감이 사라져 버렸으니 허전하고 허망하다. 이제는 유일하게 나의 잘못을 호통 친다고 해도 전혀 억울하거나 섭섭지 않던 참스승을 뵐 수 없게 되었으니 원통하다. 그토록 세상을 이곳저곳 부지런하게 뛰어 다니시고 쉴 사이 없이 지능 활동을 멈추지 않는 분은 차마 하느님도 미안해하시며 ‘천국 귀환명령’을 미루어 주시리라 믿었던 착각이 나를 몹시 애달프게 한다.

 

고이 가소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길봉섭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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