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학교개혁
손 우 정
Ⅰ.이론적 이해
1. ‘배움의 공동체’ 만들기
1) ‘배움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배움의 공동체’는 현재 일본에서 학교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핵심적인 원리로서 일본 동경대학교 사토마나부교수에 의해 주창되어 수업연구를 위한 실천적인 개념으로 정착되어 있다.
사토마나부(佐藤学、1996)는 ‘배움의 공동체’의 구축을 “학교교육이 하는 일을 사람들(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행정 담당자, 교육학연구자)의 연대를 기초로 구성되는 실천으로 전환하고 학교라는 장소를 사람들이 공동으로 서로 배우고 성장하며 연대하는 공공적인 공간으로 재구축”하는 개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를 이러한 배움의 공동체로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일상의 수업을 통해서 교실이 ‘배움의 공동체’로 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수업개혁인 것이다.
2) ‘배움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수업연구1)
무엇을 위해서 수업연구를 하느냐는 질문에 많은 교사들은 좋은 수업을 만들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훌륭한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아니다. 학교의 책임은 좋은 수업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의 책임 또한 좋은 수업을 만드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의 책임은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아이들의 배울 권리를 보장하는데 있다. 그리고 학교의 책임은 모든 아이들에게 질 높은 수준의 배움에 도전하게 하는데 있다. 아무리 좋은 교실일지라도 더 이상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수학이 싫어졌다고 하는 아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업은 성립되어 있지만 그 안에 배움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많은 아이들이 “저요, 저요”라고 의견을 말하고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수업도 정작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자신이 아는 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에 불과한 수업들이 많다. 이러한 수업이 반복될 때 아이들은 수업 안에서 배우는 것을 경시하게 되는 것이다. 배움에 대한 도덕, 모랄이 낮아지는 것이다. 수업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다른 아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선생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험에 무엇이 나올 것인가가 아이들의 배움의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수업은 화려해지고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아이들이 그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실의 3분의 1은 이미 다 아는 아이들, 그리고 3분의 1은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아이들, 나머지 3분의 1은 알았다고 대답은 하지만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교과서 또한 그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 정도 수준으로 계속 수업을 해 가면 대다수의 아이들은 모르고, 3분의 1의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수업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수업에서 배움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배움이 성립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몇 명에 국한된다.
이미 알고 있었던 아이들은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몰랐던 아이들은 아는 것 같지만 다시 보면 전혀 모르는 그런 것이다. 유일하게 배움이 성립된 것은 중간층의 3분의 1인데, 그 중에서도 반 정도밖에 몰랐는데 알게 된 아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들에게 배움이 보장되고 한명도 빠짐없이 배움이 성립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교과서보다 높은 수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사들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제일 밑에 있는 3분의 1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이에 대한 대답은 수준을 올리는 것과 함께 모르는 아이들의 “모르겠다”라는 목소리를 교사가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가장 높은 수준의 아이들과 가장 낮은 수준의 아이들을 함께 담아갈 수 있는 그런 수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교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일수록 자기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가 해결해 보려고 한다. 지혜를 발휘하여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열심히 암기하려고 하고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려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못하는 아이에게 옆의 친구에게 “이것 어떻게 하는거야?”라고 물어보게 하는 것이다. 교사에게 물어보는 아이는 많지만 옆 친구에게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교사에게 물어보는 것은 ‘날 가르쳐달라’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는 성장하기 힘들다.
친구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신의 힘으로 곤경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힘, 또 하나는 친구를 믿을 수 있는 힘이다. 즉 친구로부터 도움을 끌어낼 수 있는 힘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수업에서는 반드시 소집단을 만드는 일을 추천한다. 예로, 어떤 작업에서 프린트물가 주어지면 잘하는 아이는 1분 안에 다 풀어버리고 못하는 아이는 가만히 있게 된다. 이때 함께 배울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그냥 베껴 적어도 된다. 그러면 교사들은 또 반론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존적인 아이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가? 자립하는 아이는 어딘가에 의존하면서 자립하게 된다. 자립과 의존을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존할 수 있는 아이는 자립할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아이는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흉내를 내는 아이들도 있다.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흉내 내지만 다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똑같이 흉내 내지 않는다.
두 번째는 수업 안에 점프할 수 있는 과제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수업에 혼자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과제를 넣는 것이다. 이렇게 협동적인 배움을 통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배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우리 교실 수업의 문제는 쉬운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하는 것에 있다. 쉬운 것을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하게 하는 교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래도 모르는 아이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다. 하지만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못하는 아이들일수록 쉬운 것을 반복하는 수업을 싫어한다. 그리고 어려워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일수록 도전할 수 있는 수업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협동하면서 서로 받쳐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높은 수준으로 점프하는 일이 필요하다. 협동하고 점프하는 것은 학력이 좀 낮은 아이들을 위해 필요하다. 정서적인 문제, 의사소통의 문제로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아이들의 문제를 교사 혼자의 힘으로 해결한 사례는 본 적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고 하더라도 40명의 아이들, 중등교육에서는 200여명의 아이들을 한명 한명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사는 자신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학력이 낮거나 의사소통의 문제를 가진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그러한 문제로부터 벗어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지금 학교개혁의 가장 큰 문제는 교사들의 힘으로만 바꾸려는데 있다. 아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어떤 학급에서 공부가 싫어지거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포기하는 아이가 생기는 것은 교사뿐 아니라 그 학급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아이들에게 더 책임을 물어도 된다.
수업이 성립되지 않았는데 배움이 성립된 교실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교실의 교사를 보면 굉장히 못 가르친다. 그냥 아이들의 마음을 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어떻게든 교재에 있는 내용을 무너뜨리지 않고 잘 전달하려고 필사적이다. 배움의 공동체에서는 이런 교사를 지원하려 한다. 즉, 아이들 한명 한명의 존엄을 존중하며 교재 하나하나의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고 잘 전달하려는 신중함과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교사들을 지원하려 한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일,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일, 교재의 가치를 존중하는 일’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존중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것을 실현하려고 하는 교실에서 성실한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2. ‘배움의 공동체;의 철학적 원리 및 선결과제
배움의 공동체의 기본철학은 ‘모든 아이들의 배울 권리와 질 높은 배움을 보장’하는데 있다. 사토마나부(佐藤学、2007) ‘배움의 공동체’로서의 학교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철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운영된다고 한다.
“첫째, ‘공공성 (public philosophy)이다. 학교는 공공적인 사명 (public mission)과 그 책임에 의해 조직된 장소이며 교사는 그 공공적인 사명과 책임을 맡고 있는 전문가이다. 학교의 공공적인 사명과 이를 담당하는 교사의 책임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배움의 권리를 실현하고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학교가 책임지는‘공공성’의 또 하나의 의미는 학교가 공공공간(public space)으로 열려있다는 것에 있다. ‘공공성’은 공간개념이며 학교와 교실의 공간이 안으로도 밖으로도 열려 다양한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이 대화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교류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민주주의(democracy)’이다. 학교교육의 목적은 민주주의사회의 건설에 있으며 학교는 그 자체가 민주적인 사회조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적인 절차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죤 듀이가 정의한 것처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a way of associated living)’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원리로 조직된 학교에서 학생, 교사, 보호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각각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지고 학교운영에 참가하는 주인공 (protagonist)이다.
셋째, ‘탁월성 (excellence)’이다. 가르치는 활동, 배우는 활동은 모두 탁월성을 추구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탁월성이란 타인과 비교하여 우수하다는 의미에서의 우수함이 아니다. 스스로의 최선을 다하여 최고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탁월성이다. 경쟁에 의한 탁월성의 추구가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초래하는 것에 비하여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최고를 추구하는 탁월성은 가르치는 자에게도 배우는 자에게도 신중함과 겸허함을 가져다준다. 가르치는 활동과 배우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탁월성 추구를 포함하여 성립된다. 이러한 탁월성의 추구를 ‘발돋움과 점프가 있는 배움’으로 실현가능하다.”
한편, ‘배움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학교개혁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2).
첫째, 교실에서의 배움을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적인 실천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특히 개인주의적인 배움을 공동체적인 배움으로 전환하는 일이 핵심적인 과제이다. 이를 위해 한사람 한사람의 다양한 개성을 출발점으로 하는 활동적인 배움과 그 다양한 배움의 交感을 실현하는 협동적인 배움을 교실에 보장하며 거기에서 전개되는 배움이 학교내외의 다양한 문화적. 실천적 공동체와의 연대를 구축해 가는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학교의 공공적 사명은 학생 한사람 한사람을 자립적이고 활동적이며 협동적인 학습자로서 키우며 지식이라는 공공적인 끈으로 연결된 문화적 공동체를 하교 안팎에 구축하는데 있다.
둘째, 학교를 교사들이 공동으로 함께 성장하는 장소로 개혁하는 일이다. 배움의 공동체를 개혁철학으로 한 수업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과제는 교사 상호간에 전문가로서 서로 성장하는 '동료성(collegiality)'을 형성하는 일이다. 이 동료성이 구축되지 않는 한 어떤 학교의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동료성의 구축은 모든 교사가 교실을 열고 서로 수업을 관찰하고 서로 비평하는 일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한 사람이라도 교실을 닫고 있는 한 학교를 안에서부터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라는 장소는 외부에서 어떠한 개혁 정책이 전개되더라도 안에서부터의 자율적인 개혁이 동반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보수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부터의 개혁의 수행여부는 교사들이 서로의 실천을 공개하고 서로 비평하며 함께 창조하는 관계가 만들어지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있어 수업공개는 교사의 일 가운데 가장 힘들고 곤란한 일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먼저, 자기의 약점을 동료에게 털어 내놓기 싫고 자기가 하는 방법에 대해 동료로부터 간섭받기 싫다는 심리가 암묵적으로 교사를 지배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교실을 열고 수업을 공개하는 일이 곤란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까지의 수업공개 방식 및 평가와 교내연수 방식에서도 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업공개는 일정한 날짜에 학부모나 교육청 관계자들에게 학교가 평가받기 위한 형식적인 행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모든 학생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교사의 발언에 대답하며 활발하게 수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그 준비는 교사도 학생도 수업에 지치고 흥미를 잃게 만들고 만다. 뿐만 아니라 수업공개에 대한 평가에도 문제가 있다. 보통 수업연구회를 하면 수업을 관찰하고 어느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이 서툰가라는 평가에 치우치기 쉽다. 이러한 연구회를 수업자가 좋아할 리가 없다. 교실을 열고 수업을 공개하는데 저항을 느끼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과거에 수업을 공개하여 불쾌하고 괴로운 경험을 한 교사들이다.
교실을 열기 위해서는 수업연구회 그 자체를 충실하게 하는 일이다. 연구회 자체를 재미있게 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다. 수업을 공개한 교사가 다시 한번 공개하여 비평을 요구하고 싶은 연구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참가자에게는 다음 기회에는 자기도 수업을 공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연구회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학부모와 시민이 교사와 협력하여 교육활동에 참가하고 자신도 성장하는 학교를 건설하는 일이다. ‘교육의 私事性’이라는 견해에서 보면 학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며 학부모와 시민은 그 서비스의 소비자에 불과하지만 ‘교육의 公共性’ 원리에 입각하면 학교교육은 교사를 중심으로 학부모와 시민이 협력하여 이루어내는 협동의 공공적인 사업이라는 것이다.
넷째, 학교의 자율성을 학교 내부에서부터 수립하여 학교조직의 구조와 교육행정과의 관계를 민주화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학교는 ‘관료조직’원리를 중심축으로 내부의 운영과 행정과의 관계를 조직해 왔으나 그 파탄은 오늘날 학교교육의 획일성과 경직성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학교를 자율적인 ‘전문가조직’으로 재조직하는 일이다. 그 전문가란 과학적인 이론이나 기술에 숙달된 ‘기술적 숙달자(technical expert)로서의 전문가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상황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에 기초한 실천적인 견식을 행사하는 ’반성적 실천가(reflective practitioner)‘로서의 전문가를 의미한다. 반성적 실천가로서의 교사는 학교 내부에 동료성을 구축하여 전문가로서 협동을 실현함과 동시에 학교 외부로는 전문가나 교육행정 관계자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전개한다. 특히 학교 외부와의 협력관계에 있어서 교육연구자와 협동관계와 교육행정과의 협력관계는 학교개혁을 측면에서 촉진하는 요소가 되며 그 협력관계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재구성되어져야 할 것이다.
여섯째, 수업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한 교내연수이다. 수업을 중핵으로 하는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내연수의 개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내연수는 외부 인사를 초청한 강연회 형태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주제를 정하거나 통일된 학습지도 방법을 결정하여 교사 전원이 여기에 대응하도록 하는 형식이 지배적이었다. 통일된 방침과 통일된 지도법을 결정하여 추진하게 되면 주장이 강한 사람의 견해를 중심으로 연구회가 진행되거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추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학교를 바꾸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서로 교실을 열고 서로가 서로의 수업을 비평하는 수업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한 교내연수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과제를 그럼으로 나타내면 <그림1>과 같다.
3. 학습론의 전환 : ‘행동주의’에서 ‘구성주의’로
‘배움의 공동체’에서 배움이란 만남과 대화를 특징으로 하는 활동이며, 학습자는 지식이나 기능의 수용자가 아니라 의미와 관계를 구성하는 활동적인 주체로 정의된다. 즉, 배움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타자와의 협동으로 수행되는 사회적 과정에서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배움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구성주의 학습론이다.
구성주의에서 '배움'이란 소정의 지식이나 기능의 습득이 아니라 학습자가 사물이나 사람을 매개로 한 활동을 통해서 의미와 관계를 구성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학습 대상이 되는 세계는 학습자가 언어로 이름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비로소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의 의미는 교과서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의 도구적 사고나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구성된다고 한다.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Vygotsky의 배움의 이론은 '심리적 도구'로서의 언어에 의한 의미의 구성을 배움으로 하는 이론이다. Vygotsky(1978)는 사회적 의사소통에서 기능하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과학적 개념)과 일상생활에서 형성되고 있는 생활적인 개념(자발적 개념)과의 고차원적인 사고과정에서의 관계를 고찰하고 아이들의 정신발달은 의사소통의 언어(외언)가 개인의 사고언어((내언)로 내화하는 과정으로서 전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발달은 우선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외언'의 획득으로서 성립하고 다음으로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내언'으로 '내화'하면서 진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Vygotsky는 학습자가 혼자서 달성할 수 있는 수준과 교사나 친구의 도움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준 사이를 '근접발달영역'이라 이름붙이고 학습자의 배움이 '근접발달영역'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Vygotsky의 이론은 언어를 매개로 한 활동적이고 협동적인 배움을 추진하고 협동학습이나 동료지도(peer tutoring)를 도입한 수업을 촉진해 왔다. 의미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언어적 활동이 배움의 중심적 활동이 되어 ‘근접발달영역’을 구성하는 친구관계의 조직이나 교사와 학습자의 관계에 대한 개선도 이루어져 왔다. Vygotsky의 배움의 이론은 사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대상적 활동과 친구와 의사소통을 전개하는 대인관계와 자기 사고를 구성하는 자기 내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4. 대화적 실천으로서의 ‘배움’의 재개념화
사토 마나부(佐藤学、1999)는 배움의 대화적 구조에 착안하여 ‘배움’을 ①교육내용인 대상세계(사물)와의 만남과 대화, ②그 과정에서 수행되는 다른 학습자의 인식이나 교사의 인식과의 만남과 대화, ③새로운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대화로 특징짓고 있다.
즉, '배움'은 세계만들기(인지적 실천)와 동료만들기(대인적 실천)와 자기만들기(자기내적 실천)의 세 가지 차원에 걸친 대화적 실천에 의해서 수행되며 이 세 가지 대화적 실천이 삼위일체가 되어 '의미와 관계를 엮어가는 영속적인 과정'이 배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업을 지식이나 기능을 획득하고 축적하는 활동으로부터 지식이나 기능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활동으로 전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성주의 학습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물과 도구와 교재와 사람으로 ‘매개된 활동이 바로 배움인 것이다. 즉 교실의 배움이 ‘원조’나 ‘도구’에 의해 다층적으로 매개되는 실천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을 때 그 경험에서 교육내용의 의미가 구성되어질 뿐만 아니라 교사나 친구와의 관계가 재구성되어지며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발견하기도 하고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업에 ‘매개된 활동’을 조직하는 일은 교실에 배움을 성립시키는 첫 번째 요건이다. 그렇다면 배움에서의 원조와 도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교재나 도구로서 교실에 준비된 '대인관계'이며 '사물'이다. 교실 속의 교사와 친구로부터 배우는 일과 주변의 사물을 이용하는 일, 구체물을 조작하는 일, 체험하는 일등이다. 대수롭지 않은 약간의 사물의 준비가 아이들에게 배울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배울 의욕을 끌어내는 것이다. 특히 산수에서는 블록놀이와 같은 반구체물이 자주 사용된다. 구체물을 조작하면서 답을 찾아내는 일도 가능하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도구로서도 활용할 수 있다. 가능한 구체물에 의한 도구적 사고를 배움의 중심에 도입하는 일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앎에 이르기도 하지만 조작활동에 꼼꼼하게 관계함으로써 신체로서 앎에 이르는 아이들도 많은 것이다.
교실에 ‘매개된 활동’이 조직되면 다음은 ‘협동적인 활동'을 실현하는 일이다. 배움의 문화는 다른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의존성’과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제공하는 서로 배우는 ‘호혜적 배움’(reciprocal learning)으로 성립된다.
호혜적 배움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친구나 교사에게 전하고 쌍방향에서 서로 배우는 일이 성립하는 배움이다. 따라서 조사한 것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것만으로는 한쪽으로 기운 배움이 된다. 그리고 집단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타자와의 대화가 없으면 협동적인 배움을 한 것이 될 수 없다. 개인과 개인의 생각을 나누고 합치는 일은 하나의 결론으로 안내하는 일이 아니라 각각의 생각의 차이를 밝히고 배움을 넓히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해가면서 사고하는 상호작용적인 배움이 바로 배움의 공동체의 배움이다.
그리고 ‘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은 지식이나 기능을 획득하고 축적하는 활동으로부터 ‘표현’하고 ‘공유’하는 활동으로 전환하는 수업이기도 하다. 함께 서로 배우는 경우 자신의 생각을 친구들에게 서로 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활발하게 잘 전하는 일은 해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아이들은 적다. 표현적인 배움은 풍부한 자기표현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기표현에는 나타나지 않은 표현의 뿌리에 있는 듣는 힘이나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일을 의미하고 있다.
<자료4>대화적 실천으로서의 ‘배움’
배움의 세 가지 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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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서의 실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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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의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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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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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상과의 만남과 대화 |
……… |
작업적인 활동 |
……… |
활동적인 배움 |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 |
……… |
소집단 활동 |
……… |
협동적인 배움 |
자기와의 만남과 대화 |
……… |
표현과 공유 |
……… |
표현적인 배움 |
Ⅱ.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창조
1. 수업을 디자인한다
수업만들기의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 1단계는 ‘계획’ 또는 ‘디자인’의 단계이다. 제2단계는 ‘실시’ 또는 ‘실천’의 단계이다. 그리고 제 3단계는 ‘평가’ 혹은 ‘반성’의 단계이다. 이 3가지 단계는 행동과학에 의한 연구방법(수량적 연구)과 행동과학 이후의 연구방법(질적연구)에서 각기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행동과학의 방법에서 수업만들기는 ‘계획. 달성. 평가’의 세 개의 직선적인 과정으로 조직된다. 그리고 수업과 배움의 과정에서는 계획단계의 교육목표와 결과로서의 학업성적의 평가와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보다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은 수업과정의 통제가 목표가 된다. 따라서 행동과학에 의한 수업연구는 ‘과정-산출모델 연구’라 불려지며 이 모델에서는 수업의 세 단계 가운데 ‘계획’과 ‘평가’를 가장 중시한다.
이에 비해서 행동과학 이후의 수업연구는 오히려 수업과 배움의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연구로 이행하고 있다. ‘과정-산출모델’에서는 블랙박스가 되어 있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경험 그 자체의 의미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실천을 전개하려고 하고 있다. 이 입장에 따라면 수업은 ‘계획’에 따라 ‘과정’을 통제하고 그 가치를 결과로 평가하는 것과는 다르다. 수업은 디자인되고 교실 속의 활동 과정에서 수정되고 ‘실천’되어 그 복잡한 일들의 의미를 성찰하고 ‘반성’함으로써 보다 의미 있는 경험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디자인’ ‘실천’ ‘반성’은 단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순환적인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후자의 입장에서 실제로 수업이 창조되고 반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1)수업디자인
교사는 교육과정에서 단원의 내용과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고려하여 수업을 디자인한다.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아이들이 적목으로 건물을 세울 때처럼 손으로 더듬어가며 아이디어를 하나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재의 주제와 아이들의 대화에 의해 하나의 수업이 디자인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디자인은 수업 전, 중, 후를 통해서 수정되어 간다.
수업 디자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제’이다. 그 교재에서 아이들과 무엇을 중심으로 추구할 것인가? 그 ‘주제’가 어떠한 발전성을 띠고 있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숙고되었는가가 수업과정에서 아이들의 배움의 질을 결정짓는 것이 된다.
수업 디자인에서 주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과정의 조직이다. 아무리 의미있는 ‘주제’라도 풍부한 탐구와 표현의 과정으로 조직되지 않으면 배움의 경험은 빈약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이들의 배움의 경험을 인지적(문화적)경험, 대인적(사회적)경험, 그리고 실존적(윤리적)경험으로서 풍요롭게 실현하기 위해서 ‘과정’이 디자인되어 간다.
배움을 중심으로 한 교육과정만들기는 구체적으로는 사물과의 만남과 대화, 친구와의 만남과 대화,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대화를 단원의 단위로 하여 조직하는 것에 있다. 교과학습이든 재량활동이든 ‘활동적이고 협동적이며 반성적인 배움’을 하나하나의 단원으로 조직하는 것이 교육과정만들기라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단원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교육과정만들기의 중심과제이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학교교육에서 단원은 ‘목표.달성.평가’의 단위로 조직되어 왔다. 교육내용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그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활동을 수업과정에서 조직하여 그 달성도를 목표에 비추어 테스트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 ‘ 목표.달성.평가’를 단위로 하는 단원은 ‘계단형’교육과정을 구성하고 다량의 지식이나 기능을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을 가능하게 해 왔다. 그러나 그 폐해도 명백하다. ‘계단형’교육과정에서 배움의 경험은 협소하고 획일적이며 평가는 간단하지만 일원적이다.
앞으로의 학교교육의 단원은 ‘주제.탐구.표현’을 단위로 하는 ‘등산형’교육과정으로 디자인 할 필요가 있다. 교육내용의 핵이 되는 주제를 설정하고 아이들이 다양한 접근으로 활동적. 협동적으로 탐구활동을 전개하고 그 성과를 표현하며 서로 공유하는 배움의 창조이다.
배움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과정만들기는 실천적으로 말하면 교육과정의 단원을 ‘주제.탐구.표현’의 양식으로 디자인하고 ‘활동적이고 협동적이며 표현적인 배움’을 교실에 실현하는 도전인 것이다.
2)수업실천
교실에서의 실천 단계에서는 ‘디자인’과 ‘반성’의 쌍방의 과정을 조직한 복잡한 활동이 전개된다. 이 교사의 활동이 ‘인지적(문화적)실천’ ‘대인적(사회적)실천’ ‘실존적(윤리적)실천’의 세 가지 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은 이미 앞서 제시한 바와 같다.
아이들의 의사소통에 한정하여 볼 때 수업과정에서의 교사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개인 대한 대응’이다. 교사는 교실에서 ‘모두’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교실에 ‘모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한명 한명의 아이들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행하는 일대일의 관계에 있는 것은 많은 수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에 대한 대응’은 의사소통의 기본적인 요건일 뿐 만 아니라 교실에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중요하다. 아이들의 관심과 능력이 다양한 것처럼 한 사람 한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도 다양하다. 한 사람 한 사람 체격이 다른 사람의 양복을 만드는 양복점처럼 교사가 행하는 ‘개인에의 대응’은 ‘테일러링’이라고 부르고 있다.
교사가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에서 행하고 있는 또 하나의 활동은 ‘個와 個의 조정’이다. 교실은 다양한 아이디어나 이미지를 교류하면서 서로 배우는 장소이다. 하나의 과제에도 다양한 접근이 생겨나며 하나의 말에도 다양한 이미지가 표현되고 하나의 의미에도 다양함 맥락이 나타나고 있다. 아이들의 배움이 풍부하게 확실하게 전개하는 교실은 교사에 의해 한사람 한사람의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차이가 존중되고 풍부하게 교류되는 교실이다. ‘개와 개의 조정’를 조직하는 활동은 교실의 일의 중심으로 이루고 있다.
이 ‘개와 개의 조정’을 미국 교사는 ‘오케스트레이팅’이라고 부른다. 한사람 사람 다른 음색으로 대은 소리로 하나의 음향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레이팅’은 교실의 의사소통의 전개를 확실하고 풍부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교사는 ‘테일러링’과 ‘오케스트레이팅’의 두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나 이미지가 교실에서 만들어 나오는 것을 촉진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나 이미지의 차이를 울려퍼지게 하는 의사소통을 조직하여 배움의 경험이 인지적으로도 대인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되도록 아이들을 원조하고 있다(사토마나부,2006).
3)성찰과 반성
‘성찰’과 ‘반성’은 수업의 전, 중, 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수업 전의 ‘성찰’에서는 교재와 학습 환경의 발전성과 아이들의 배움의 가능성에 대한 성찰로서의 수업을 ‘디자인’하는 활동 가운데에서 행해지고 있다. 수업 가운데의 ‘성찰’과 ‘반성’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교실의 상황에 대응한 즉흥적 활동 가운데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수업 후의 ‘반성’은 교재와 아이들의 활동과 교사자신의 활동의 평가로서 행해지고 있다.
‘성찰’과 ‘반성’은 두개의 대화에 의해 성립되고 있다. 하나는 ‘상황과의 대화’이며, 또 하나는 ‘자기와의 대화’이다. 이 두 가지 대화는 ‘실천’을 성립시키는 두 가지 기본요건이며 ‘성찰’과 ‘반성’ 능력은 교사의 전문가로서의 능력의 중핵을 형성하고 있다. 뛰어난 교사는 ‘상황과의 대화’와 ‘자기와의 대화’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찰’과 ‘반성’은 상황이 제기하는 과제를 스스로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활동이기도 하다. ‘성찰’과 ‘반성’에 뛰어난 교사는 수업의 실패 원인을 아이들이나 교과서의 탓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과 그 ‘디자인’에서 찾고 수업자 자신에 의해 부단히 행하고 있지만 교내나 써클의 동료와 협동으로 행하는 기회는 자신의 편을 넓혀 경험주의로부터 벗어나는데 중요하다.
2. ‘활동적이고 협동적이고 표현적인 배움’을 만들자
1) 활동적인 배움
가. 수업에 ‘주변 사물과의 접촉’, ‘구체물의 조작’, ‘체험’을 포함시킬 것.
수업소재(텍스트)와 꼼꼼하고 차분하게 접함으로써 ‘해 보고 싶다’라는 동기(학습의욕. 필연성)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대단치도 않은 사소한 사물의 준비가 아이들에게 배울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배울 의욕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학에서는 블록 등 반구체물이 종종 사용된다. 구체물을 조작하면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도구로서도 활용할 수 있다. 가능한 구체물에 의한 도구적 사고를 배움 속에 넣어가는 일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알 수도 있지만 꼼꼼하게 조작활동을 함으로써 몸으로서 앎에 이르는 아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나. 소재(텍스트)와 몇 번이고 만나게 하기
다시 읽고, 다시 조사하는 등 몇 번이고 소재와 관계를 만들어간 경험이 그 이후의 배움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대상과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일은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상과 수업에서 ‘활동적인 배움’이란 기본적으로는 문제해결을 위한 사고를 동반하는 활동이나 배운 것을 사용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① 관찰하기, 반복해서 읽기, 생각을 정리하기, 확인하기, 조작적인 활동을 하기, 반구체물에 의한 사고, 배운 것을 사용하는 등 지적인 작업 활동
② 사물을 사용하여 추론하거나, 탐구하거나 하는 문제 해결적 사고 활동
③대상과 꼼꼼하게 관계하기,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진 활동 등을 수업 속에 포함시키는 일로 실현할 수 있다.
2) ‘협동적인 배움’
모둠 활동을 구성함으로써 인수가 적기 때문에 친구와 의사소통하는 배움에 참가하기 쉬워진다.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친구와 서로 이야기하는 일이 배우는 즐거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둠 구성원은 가능하면 4명이 가장 적절하며 남녀 혼합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이 정도의 인수가 가장 서로 이야기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협동적인 배움의 목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보충하거나 발전시키거나 하는 활동이 중심이 되며 모둠에서 하나의 생각으로 의견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둠에서의 이야기 후에 “우리 모둠에서는...”식의 발표는 절대 피하는 것이 좋다. 모둠에서 배운 것이라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의견으로 “나는...”으로 시작되는 표현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둠 활동은 잘 몰라서 곤란해 하는 아이가 친구에게 스스로 “가르쳐줘”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반대로 질문을 받은 아이는 책임지고 친구에게 대답해 줄 것이 요구된다. 친구들 간에 서로 배우는 일은 他者를 알게 되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협동적인 배움은 ①소집단 활동이기 때문에 가볍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모든 아이들이 배움에 참가할 수 있게 한다.②다양한 사고방식을 서로 조정하거나 새로운 생각을 협동으로 생각해 내면서 배움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 ③이해할 때까지 친구에게 물어볼 수 있다. ④때에 따라서 교사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게 개별지도를 통해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⑤교사가 개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아이의 수는 한도가 있다. 잘 하는 아이가 저 학력층의 아이를 돌보면서 학급 전체의 학력향상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① 개인과 개인의 생각을 서로 조정하는 협동적인 탐구
② 상호 교류하는 일
③ ㄷ자형 책상배치와 남녀혼합 4인 모둠구성
3) ‘표현적인 배움’만들자
표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큰 목소리로 활기차게 표현하거나 적극적으로 손을 드는 일을 ‘표현적인 배움’으로 오해할 때가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표현적인 배움’을 ‘표현의 공유’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표현의 공유’란 타자의 표현을 귀와 눈을 집중시켜 잘 듣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비추어보기도 하면서 서로 배우는 일로서 ‘모노로그’가 아니라 ‘다이아로그’를 의미한다.
표현의 공유는 소집단 활동에서도 이루어지지만 특히 일제수업 형태의 과정을 표현의 공유의 장으로 하기를 권하고 싶다. 예로, 노트에 적힌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끝나버리는 발언은 ‘모노로그’이지만, “OO의 의견에 생각해 낸 것인데...”라든가 “OO의 의견과는 다르지만...”이라든가 친구의 발언을 받아들여 발언하는 것이 바로 ‘다이아로그’이다.
가. ‘집단 속의 나’를 표현하게 하자
표현적인 배움’은 집단 속의 나를 발견하는 일로 실천된다. 표현은 개인에게 귀결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 배움이라고 하더라도 발표는 집단 속에서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표현시키는 것이다
나. 자기답게 배우게 하자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음에도 아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할 때가 있다. 그것과 반대로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공부는 끊임없이 마침표를 찍어가는 일이지만 배움은 끊임없이 시작을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 친구로부터 촉발된 표현
자신의 생각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아이들은 많다. 그러나 그 발언에 축적되어 가는 것이 없는 수업이 적지 않다. 자주 이야기되어지는 교사와 학생의 일대 일 수업이 그렇다. 배움의 질은 높이는 데는 교사와 아이들을 이어주는 날실로서의 지명과 아이들의 반응에 더해 아이들 간을 이어주는 씨실로서의 발언의 연결이 필요하다.
3. 수업에서의 교사의 역할
1)듣기
배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교사나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고 겸허하게 들을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기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분명 차분한 학급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사는 아이들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정중하게 대응하는 자세를 보이는 일이다. 아이들이 잘못 발언하더라도 그 아이는 그 아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 “틀렸어. 자 다음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처리하지 않고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필요하다.
교단에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교사의 생각에 따라 아이의 의견을 듣는 경향이 있다. 교사의 생각과 엇갈리는 ‘異교통’의 이야기는 교사 자신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무시하기 쉽다. 교사가 일단 무시하거나 배제하거나 하면 두 번 다시 그 아이는 발언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누구라도 좋아서 자존심을 상하는 행위를 계속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업의 전개에서 ‘이교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지 않을까?
교사의 듣는 일은 학습자의 내면의 목소리까지 들어내는 일로서 구체적으로는,
① 학습자의 목소리가 교재의 어떤 부분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을 듣는 것
② 학습자의 발언이 다른 학습자의 발언과는 어떤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온 것인지 듣는 일
③ 학습자가 이전에 발언했던 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듣는 일이다.
2)연결짓기
교사는 수업에서 교재와 학습자를 연결 짓고, 학습자 간을 연결 짓고, 오늘 수업과 내일 수업을 연결 짓고, 지식과 지식을 연결 짓고, 어제 배운 것과 오늘 배울 것을 연결 짓고,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결 짓고,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 짓는 일을 한다.
교사는 연결짓는 일에 철저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사들은 ‘연결짓기’ 보다는 ‘끊는 일’로 시종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oo 의견은 어떻니?” “그렇군, 자, 다른 의견은?”등으로 지명하면 발언과 발언의 연결고리는 끊어져 버린다. 이때 반대로 “oo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듣고 xx는 어때?”라고 하면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짓기는 수업에서 교사가 아이들의 발언을 듣고 그대로 종결시킬 것이 아니라 “oo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oo의 발언은 누구의 발언과 같을까 다를까?” “oo가 하는 말이 교재(교과서)의 어디에 쓰여져 있니?” “oo가 한 것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니?”등 한사람의 발언을 다른 아이의 발언과 이어주는 일이다. 수업에서의 교사의 활동을 검토할 때는 교사의 활동이 ‘연결짓는’ 활동이 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데 있다.
3)되돌리기
교사의 역할 중에서 되돌리기 활동은 경시되는 경향이 많다. 수업 중에 “ 다음은 어떻게 되지?” “다음은 어떻게 되지?”라는 식으로 앞으로 앞으로만 치우쳐 버리는 교사가 많다. 이 경우, 다수의 아이들은 버려지고 일부 아이들의 참가로 수업이 진행되게 된다.
함께 탐구해가는 수업을 창조하는 교사는 ‘되돌아가기’의 의의를 숙지해야 할 것이다.학습과제가 어려울 때에는 그 전 단계로 되돌아감으로서 재출발할 수 있으며,모둠 지도에서는 되돌아감으로서 한사람 한사람의 참가를 촉진하고 다양한 개인들의 충돌을 조정하여 높은 배움을 실현 할 수 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발언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고 그 발언이 다른 아이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 -라고 말하네요”라며 다시 말하여 다른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되돌려주는 일, 이야기를 모둠으로 그리고 전체로, 교재로 그리고 그 전에 했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되돌리는 일만큼은 아이들이 할 수 없다. 이 일은 교사가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 아이들은 배움에의 도전과 발돋움이 이루어질 수 있다.
Ⅲ.수업사례를 중심으로 한 교내연수
지금까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내연수는 외부 인사를 초청한 강연회 형태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주제를 정하거나 통일된 학습지도 방법을 결정하여 교사 전원이 여기에 대응하도록 하는 형식이 지배적이었다. 통일된 방침과 통일된 지도법을 결정하여 추진하게 되면 주장이 강한 사람의 견해를 중심으로 연구회가 진행되거나 한 사람 한사람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추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학교를 바꾸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서로 교실을 열고 서로가 서로의 수업을 비평하는 수업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한 교내연수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1. 수업관찰 및 기록
‘관찰과 기록’은 교실에서 수업을 관찰하고 그것을 필드노트나 테이프레코드나 비디오카메라로 기록하는 활동이다. 일반적으로는 이 ‘관찰과 기록’에서 데이터를 수집한 후에 수업연구가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관찰과 기록’은 그 자체가 수업연구를 결정하는 주요한 활동의 하나이다. ‘관찰과 기록’에는 수업에 대한 견해와 사고방식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관찰’에서는 ‘어디에서부터 볼 것인가?’ 와 ‘무엇을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수업연구에서는 교실 뒤편에 참관자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져 있고 교실 뒤편에서부터 수업을 참관하는 광경이 일반적이지만 교실 뒤편에서 참관할 수 있는 것은 교사들의 생각일 뿐이다. 이미 100년 이상 교단에서의 교사의 교수기술을 「수업」으로 생각해 온 전통이 그런 식의 참관자 의자로 표현되어져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관찰위치
‘관찰’에서 참관자는 교실의 옆면에서, 가능하면 앞방향의 측면에서 관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위치가 아니면 아동의 학습의 구체적인 모습과 움직임을 볼 수 없으며, 교사와 아동간의 상호작용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위치에서가 아니면 수업의 진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교실의 時空을, 어떤 때에는 수업자와 공진하며 또 어떤 때에는 교실의 학습자와 共振하며 참관자가 함께 호흡할 수 없다. 교실 관찰은 공장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를 감시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교실의 측면에서 참관하게 되면 아동들의 視界에 들어가 방해가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감시의 눈길로 배려를 받기보다는 참관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아동들도 안심하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커다. 물론 참관자가 찌푸린 얼굴로 노트에 메모만 하고 있거나 허점을 찾아내기 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면 아동이 학습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명료하다. 그런 참관자에게는 교실 뒤편에 의자를 마련해주거나 참관을 거절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참관에 있어서는 교실의 시공에 대한 관계방식도 중요하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밀하게 메모하기보다도 그 교실의 時空을 수업자와 학습자와 함께 숨쉬며, 수업을 즐기거나 혹은 때로는 고심하는 편이 유익하다. 참관자라 하더라도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몸을 두고 있는 방향에서는 수업에 참가해야 하는 것이다. 메모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히려 발언기록이나 필드노트의 작성은 참관 후에 하기로 하고, 교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관찰에 전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참가관찰(participant observa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2)무엇을 볼 것인가?
수업연구를 중심으로 교내연수를 할 때 수업을 보는 관점을 익히는데 유익하다.
가. 학습자에의 대응
수업에서 학습자 한명 한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교사와 학습자와의 관계, 학습자 상호간의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즉, 모든 아이들이 안심하고 마음을 열고 서로 격려하는 관계를 교실에 구축하는 일이다. 따라서 관찰과정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중심적인 사항은 학습자 한명 한명에 대한 교사의 대응이다. 보통 수업연구에서는 교재연구, 수업전개연구, 발문과 지시를 중심으로 검토되고 있다. 교재의 내용과 수업의 구성에 있어서도 그 수업에서의 학습자 한명 한명의 배움의 실상과 그에 대한 교사의 대응과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업연구회에서도 그 수업에서의 학습자 한명 한명의 배움의 사실에 입각하여 교사가 대응하는 실제를 화제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개혁을 시작하는 해에는 교사의 발문과 교재의 해석에 대한 것보다는 아이들이 배우는 구체적인 양상과 교사의 대응을 중심으로 서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 학습자 한명 한명의 중얼거림과 당황함을 교사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 교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의 배움으로 발전할 싹을 손상시키는 대응은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 예기치 않은 아이들의 반응에 대해 교사는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는가?
-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행하고 있는가?
나. 듣는 것을 중심으로 교실만들기가 진행되고 있는가?
서로 배우는 관계의 기초에는 서로 들어주는 관계가 있다. 자칫하면 교사들은 아이들의 발언력을 강조하기 쉬우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한사람 한사람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중심으로 지도하는 일이다. 어떤 아이라도 안심하고 발언 할 수 있는 교실은 이질적인 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 서로듣는 관계를 만듦으로서 실현 할 수 있다. 듣는 행위는 배움을 배움으로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잘 배우는 아이는 이야기를 듣는데 능숙한 아이이다.
대부분의 교실은 이 듣는 관계가 아이들 가운데 구축되어 있지 않다. 서로 듣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 이런 교실에서는 남에 대한 무관심이 지배적이고 서로 배우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서로 듣는 관계는 먼저 교사 자신이 학습자 한명 한명의 소리에 주의 깊게 정중하고 끈기 있게 듣기를 계속해야 한다. 교사가 아이들 한명 한명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대응하고 정중하게 대응할 때 비로소 아이들 가운데 서로 듣는 관계가 생기고 교실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을 깊게 음미하면서 서로 교환하는 관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3)기록방법
‘기록’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녹음기에 의한 기록, 비디오카메라에 의한 기록, 사진에 의한 기록, 이야기(스토리)에 의한 기록 등이다. 이들 중에 가장 객관성이 강한 기록은 녹음기에 의한 기록이며, 가장 주관성이 강한 기록은 이야기(스토리)에 의한 기록이다. 비디오카메라에 의한 기록은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디오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테이프레코드와 마찬가지로 객관성이 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객관성이 강한 기록이 수업연구에서 바람직한 기록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주관성이 강한 기록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기록 성격과 한계를 인식해 두는 일이다.
비디오카메라에 의한 기록은 교실 속의 분위기나 교사와 아동의 신체와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나아가 몇 번이고 재현하여 擬似적이긴 하지만 교실에서의 참관을 체험할 수도 있어 이용가치가 높은 기록이라 말할 수 있다.
비디오카메라에 의한 기록도 앞의 ‘관찰’과 마찬가지로 ‘어디서부터 기록할 것인가?’와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선 카메라의 위치부터 말하면 교실 창 측의 비스듬한 전방에서 촬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위치에서 발언자를 중심으로 주위 아동들의 모습을 포함한 아동들의 움직임의 영상을 전체의 2분의 1정도, 교사의 움직임을 찍은 영상을 전체의 3분의 1정도, 그 나머지를 교실전체의 움직임과 특징적인 아동의 동작을 영상으로 구성하는 일을 기본으로 촬영하는 것이 좋다.
2.수업 사례를 중심으로 한 교내연수
사토 마나부(2001)는 수업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교내연수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첫째는, 횟수를 들고 있다. 즉, 2,3번의 연구로 수업에 대해 깊이 있게 서로 배우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몇 십 회라는 사례연구를 겪어야 비로소 서로 깊게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수업 가운데 연수를 자리 잡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사전 검토 보다는 사후 반성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수업 그 자체를 통해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사전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는 없으나 사후 검토에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어떤 수업에서도 배울 사항은 가득한 것이다. 보통 연수에서는 사전에 시간을 들이고 사후는 30분 정도로 끝내고 만다. 사전 협의에 과잉의 시간을 들이는 것은 사후에 이런 저런 말을 듣기 싫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어적인 자세와 듣기 싫은 소리를 하거나 결점을 지적하는 연수방법이야말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업을 중심으로 한 연수는 그 수업의 좋은 부분과 서툰 부분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수업의 좋고 나쁨을 논의하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수업 연수의 목적은 수업의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는가를 서로 이야기하는 일, 수업의 어느 부분이 어려웠던가를 서로 공유하는 일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의 배우는 구체적인 모습을 서로 이야기하는 일이다.
1) )교내연수의 원리와 방법
수업개혁을 통한 학교개혁을 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사가 전문가로서 함께 성장하는 ‘동료성’구축을 학교개혁의 중축으로 설정하고 학교경영의 중심에 교내연구를 설정해야 할 것이라 본다. ‘배움의 공동체’로서의 학교에서는 우선 교사자신이 ‘가르치는 전문가’에서 탈피하여 ‘배우는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배움의 공동체’로서의 학교에서는 아이들 한명 한명의 배울 권리가 실현되어져야 함과 동시에 교사들도 한명도 빠짐없이 교육전문가로서 성장할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안된다.
‘배움의 공동체’만들기에서 함께 추진해야 할 교내연구는 지금까지의 학교 교내연수와는 목적도 성격도 방식도 다르다.
가. 모든 교사가 일 년에 한번은 수업을 공개하여 사례연구를 축적한다.
한명의 교사라도 교실을 닫고 있는 동안은 학교를 안에서부터 개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교사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실을 닫고 있는 한 그 교사는 아이들은 사물화하는 것이며 교실을 사물화하고 있으며 학교를 사물화하는 것이 된다. 학교는 교사들이 집단적으로 연대하여 아이들 한명 한명의 배울 권리를 실현하는 장소이다.
나아가 아이들 간에 서로 배우는 관계를 구축하고 교사들이 전문가로서 서로 배우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말해서 100회 정도의 면밀한 수업 사례연구가 필요하다. 수업은 보통 교사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복잡한 일이며 지성적인 일이다. 배움을 중심으로 수업개혁과 교사의 전문가로서의 성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업관찰에 기초하여 2시간 정도의 토의를 포함한 사례연구를 100회 정도 쌓을 필요가 있다.
나. 일상의 수업을 공개하고 사전연구(planning)가 아니라 수업후의 성찰(reflection)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의 교내연수는 일반적으로 수업 전의 지도안은 며칠에 걸쳐 열심히 검토하나 수업 후의 연구는 오히려 단시간에 끝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연구목적이 ‘좋은 수업’의 추구에 있으며 연구방법이 ‘가설-검증’ 모델에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시간의 수업 검토에 ‘가설-검증’모델을 채용하는 일은 비과학적이며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연구해야 할 사항은 ‘가설-검증’이 아니라 ‘일어난 일의 의미의 다양한 해석’이며 ‘일어난 일의 관계의 구조적 인식’이다. 그리고 배움의 창조를 목적으로 한 수업연구에서는 ‘어디에서 배움의 성립하고 어디에서 배움의 주춤거리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며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면밀하게 연구하는 것이 중심과제가 된다.
다. 연구테마는 교사 개개인이 설정해야 할 것이며 교내의 통일적 주제는 설정하지 않던가 아니면 최소한에 그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교내연수는 학교에서 하나의 연구주제를 설정하여 그 통일된 주제를 교사가 구체화하여 연구하는 방식이었다. 만일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연구를 한다면 웃기는 이야기일 것이다. 연구는 개인이 설정한 주제에 따라 추진되어져야하며 독자의 주제를 가진 개인이 동료와 협동하여 추진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사의 실천적 연구는 개성적이며 다양해야하며 그 다양성의 교류를 통해 개개인이 전문가로서의 성장이 촉진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수업연구협의회의 진행
동료성을 구축하는 교내연수에서는 협의회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교내연수에서는 수업 참관자가 수업의 개선점에 대해 조언하고 의견을 이야기하는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이 방식은 근본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만약에 한 수업자의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 참관자가 다른 가르치는 방식을 조언했다고 할 때 그 조언은 과연 어느 정도 의미를 가질까? 어느 한 장면에 한정하여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가르치는 방식’은 100개도 넘을 것이다. 수업자의 가르치는 방식에 참관자가 다른 가르치는 방식을 조언했다고 하더라도 그 조언은 그 참관자의 가르치는 방식을 제시해 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자신의 가르치는 방식을 고집하는 참관자는 조언하기보다는 그 방식으로 자신의 수업을 하면 되는 것이다.
수업협의회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수업자와 참관자의 ‘보고-보임을 당하는’관계는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라도 숙련교사의 수업자에게 한마디의 의견은 말할 수 있으며 수업자는 의견을 감수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수업자는 공격과 비판에 무방비이며 참관자는 재판관과 같이 권력가의 위치에 있다. 그 권력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교내연수에서 교사가 서로 배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교내연수의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가. 이야기 대상을 “어떻게 가르쳐야 했는가”에 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어디에서 배우고 어디에서 주춤거리고 있는가”라는 사실에 둘 것.
수업연구의 목적은 ‘훌륭한 수업의 창조’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관계의 창조’과 ‘높은 수준의 배움의 실현’에 있다. 수업사례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은 교재 해석이나 교사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실 아이들 한명 한명의 배움의 구체적인 사실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성찰과 자상함과 확실성과 풍요로움이 창조적인 수업의 기초를 제공한다.
나. 이야기 과정에서 참관자는 ‘수업자에의 조언’이 아니라 그 수업을 관찰하고 스스로 배운 것을 이야기하고 그 다양성을 교류하며 함께 배울 것.
일반적으로 말해서 교사들은 배움에는 서투르다. 특히 동료교사로부터 배우려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문제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교사 상호간에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서로 존경하는 관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 직장에서 ‘동료성’이 길러질 리가 없으며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의 성장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교내연수에서 참관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업자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참관자자신의 ‘배움’이다. 이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교내연수는 모든 교사에게 있어 매력적인 배움의 터가 되며 모두가 솔선하여 수업자를 지원하는 연대가 형성된다.
다. 이아기하는 장에서 모든 참가자는 최소한 한마디는 반드시 발언해야 하며 목소리 큰사람이나 지도적인 인물에 지배되지 않는 민주적인 토의를 실현할 것.
어떤 학교의 교내연구도목소리 큰 교사나 지도적으로 행동하는 교사가 존재하지만 그러한 교사가 실천적으로 뛰어난 예는 드물다. 오히려 조용히 말없는 교사 가운데에 아이들의 배움을 성장시키는 교사는 많다. 교사의 일은 본질적으로 소박한 일인 것이다.
교내연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교사의 다양한 목소리가 교류되어질 필요가 있다. 조용한 교사의 솔직한 의견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어떤 경우라도 한마디는 발언한다라는 최저한 기준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원래 수업을 참관하고 수업자에게 감사를 한마디씩 이야기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기준이나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연구회가 많다. 사회자에게도 문제가 있다. 사회자의 역할은 모든 교사에게 발언할 기회를 보장하는 일, 가능한 한 솔직하고 구체적인 발언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역을 맡은 교사는 필요없는 개입을 지나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가 화제를 몇 개로 모아버리거나 의견을 정리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한다. 하지만 오히려 조용히 한 사람 한사람의 발언을 듣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사회는 역할상 이야기의 초점을 정리하거나 요양하는데 정력을 쏟고 있지만 그 일로 인해 이야기가 경직화되어 내용이 깊이를 잃어가기도 한다. ‘요약정리하지 않기’를 철칙으로 하여 사회를 보는 것이 최선이다.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는’연구회가 오히려 결실이 큰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항들과 병행하여 학교 조직과 운영을 단순화하는 과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해 보겠다. 한 학교에서 100회의 수업의 사례연구를 행한다고 하면 현재의 학교 직과 운영을 과감하게 단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교사는 전문가로서의 일 이외의 잡무와 회의에 쫓기고 있다. 아이들과 교사의 배움을 중심으로 학교조직과 운영은 대담하게 단순화되어질 필요가 있다. 그 개혁도 병행하여 진행해 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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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에서는 2006년 서울시대안교육센터 주최의 사토마나부교수 초청 수업연구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일부 참고하였음을 밝혀둠.
2) 선결과제는 사토마나부의 글(佐藤学、1996)과 부산대학교에서 2년간에 걸쳐 연구한 ‘배움과 돌봄의 학교공공체만들기’(한대동외,2008)결과보고서를 참조하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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