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한마당/여기는 라오스, 라오스입니다.

내가 어찌어찌하여『깍사』가 된 사연은 …

허니강 2015. 11. 20. 22:28

 

강허니

 내가 자라던 옛 시절에는 여자는 긴머리를 자르고 남자는 중머리를 깍아야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른다는 것과 깍는다는 것이 별반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처럼 생각 될지 모르지만, 어릴 적에 아버님이 옆집에서 빌려 온 고물의 이발 기계로 직접 내 머리를 깍아 주시거나 초․중등학교 교내 이발소에서 일반적인 사용 연한을 훌쩍 넘겨 날이 무뎌진 기계 성능으로 말미암아 생 머리털이 뜯겨져 나올 때의 고통은 그야말로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가 누나 머리를 잘라 주실 때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왜 하필이면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 마치 성숙한 여자들이 달거리 하듯이 매월 단위로 이런 수난을 겪어야 하는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행여 너무나 고통스러운 끝에 소가 도살장에 들어 갈 때 흘린다는 굵직한 눈물을 주루루 흘리게 되면 아버님 또는 이발소 주인아저씨께서는 ‘자고로 씩씩한 사나이는 태어날 때와 부모 돌아가실 때나 우는 거라’며 또 한 차례 야박스런 호통을 치곤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특별히 아버님 따라 고급 이발소에라도 가게 되면 그때는 마치 내가 천국에 가 있는 것처럼이나 행복했었던 기억이 아직껏 남아있다. 남의 손으로 머리도 감겨 주고, 기분 좋은 면도까지? (헤~헤).

 

나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줄곧 정년 이후에는 뭐하고 살 것인가를 오랫동안 궁리하였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세상 물정 모르고 호강에 복 바치는 소리하고 있다’고 된통 핀잔을 듣기도 했다. 내가 그토록 그런 일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는 딱히 남보다 특별히 잘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무던히 많은 분야의 취미나 특기 활동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여전히 타고난 무능력과 현실적인 실행능력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한때는 정년하면 환경이 열악한 시골이나 섬마을과 같은 무의촌에 가서 민속요법에 의한 의료봉사를 해 볼 생각으로 우연히 접하게 된 전래의 ‘침구학 이론과 실습’ 에 입문하여 몰입해 본 일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행법상 <돌팔이 무면허 의료 행위>로 간주되어 무의촌이 아닌 무인도에 유배될 수도 있다는 엄포 때문에 도중에 포기해 버렸다. (지금은 워낙 의료보험 제도가 발달된지라 내가 일찌감치 그런 허황된 꿈을 버린 것은 일단 잘한 일인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이 글의 초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릴 적의 이발에 관련된 나의 악몽이 다시는 우리 후세대들에게 대물림되지 않게 하기 위해 보다 기계적 작동이 유연한 이발도구를 이용하여 돈이 없어 이발요금마저도 아껴 써야하는 아이들이나 노인양반들을 위해 봉사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으나 요즘 세상에서는 ‘이발사’라는 직업마저 ‘미용사’라는 직업에 흡수 통일되어 마땅히 배움의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내가 평소에 단골로 애용하는 미장원에 가서 원장님께 내가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라오스에 ‘교육 봉사’를 가게 되었는데, 막상 가서 마땅히 봉사할 수 있는 재능이 없어 고민이라며 ‘그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이발 기술이라도 배워 둘걸 그랬다’고 했더니 당장에 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좋은 일을 하겠다면 내가 직접 가르쳐 주겠다. 그뿐만 아니라 필요한 이발도구 일체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해 오셨다. (아이쿠,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그 즉시로 현장에서 원장님 오빠 분을 실습 대상으로 초빙하여 최 단기 이용 실습 연수를 받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예전에 비해 워낙 기계 성능(전기 충전식)과 부속된 간편 도구가 발달되어서 아주 짧은 시간에 무난히 도제 기초 수업 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이곳 라오스 ‘살롬 스쿨’ 현장에서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나의 최초 실습 ‘희생양’을 찾아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그만 첫 작품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말도 잘 안 통하는 이국땅에 와서 혹시 그날 밤 늦게라도 화가 난 학부형이 쫓아와 소란을 피우게 되면 난 어찌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그 일을 실패의 경험으로 하여 이제는 꽤 많은 자발적인 고객을 얻게 되었다. 어제는 교당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 보았더니 어떤 여자 아이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와서 머리를 깍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내 집에까지 찾아 온 손님을 내 어이 거절할 수 있으랴. 각별히 정성을 들여 머리를 다 깍아 주고 났더니 몇 번이고 고맙다(곱자이)며 꼬깃꼬깃한 잔 돈 몇 푼을 우물쭈물거리며 내 놓았다.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결코 돈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한국말로)’고 했더니 ‘곱자이’, ‘곱자이’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감동어린 표정으로 무거운 철문을 가볍게 열고 나갔다.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