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내 생각, 내 마음

나의 ‘글쓰기 편력’에 대하여 (1)

허니강 2015. 7. 22. 23:05

 

강헌희

누구나 늙어가면서 인생 경륜이 쌓이다보면 할 말은 많아지는데 비해 갈수록 주위에 귀담아 들어 줄 사람은 적어 외로워 질 때가 많다. 하는 수 없이 만천하의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글로서라도 내부에 충만해 있는 표현 욕구를 분출시켜 보고자 하나 막상 타고난 글재주가 짧아 답답해하는 이들이 많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굶주린 자가 배고파하듯이 때때로 불현 듯 끓어오르는 내적 충동을 견디지 못해 새삼 글쓰기가 고파질 때가 있다. 그래서 ‘지가 무슨 유명한 작가라도 되는 체 한다’는 비난이 두려워 머뭇거려왔던 나의 ‘글쓰기 편력’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 대부분 실력 없는 선생일수록 중언부언 말이 많은 것처럼, 아무래도 내 이야기도 장황하게 늘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예 몇 차례로 나누어 내 블러그에 연재해 보려한다. 내 진부한 글 솜씨에 식상해 있는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란다)

 

이제 내 나이 들어 굳이 숨길 것도 없어 비로소 실토하는 말이지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받아쓰기' 시험에서 낙제 점수(60점 이하)를 맞은 일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매번 학부모에게 시험 결과를 통보하는 수단으로 시험지 하단에 두 개의 밑줄로 표시된 점수 옆에 확인 날인을 받아오도록 하셨다. 그래서 나처럼 공부하는 싹수가 노오란 아이들에게는 치욕적인 열등감을 자극하여 낮은 학업 성취 의욕을 끌어 올리려 하고, 한 동네 내 친구처럼 장차 큰 인물로 자랄 수 있는, 파아란 희망의 싹이 보이는 아이들에게는 높은 우월감으로 보상하는 방법으로 차별화된 수월성 교육을 아주 성실하게 실천하고 계셨다.

 

나는 그 나이에도 비관적인 내 학업의 장래에 대해 크게 실망하시게 될 부모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꾀를 내어 공부 잘하는 아이를 둔 내 친구 어머니께 부탁하여 희미하게 뭉게뜨려진 가짜 날인을 받아 제출함으로서 ‘내 아이는 천재’라고 믿고 싶어 하시는 부모님으로부터의 꾸중과 질책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말하자면 비록 공부하는 머리는 둔재였지만 잔머리 굴리는 데는 천재적 기질을 아주 어린 나이에 내보인 것이다.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그 때, 그 일이 내 인생의 첫 번째 거짓의 일탈 행위였던 것 같아 지금껏 잊지 않고 기념해 두고 있다.

 

하여튼 초등학교 때는 그 흔한 장문의 ‘글짓기 상’을 한 번도 받아 본 기억이 없고, 그렇다고 남이 써준 원고대로 감정을 실어 열변을 토하는 웅변 능력마저도 갖추지 못하였으며 하다못해 국가적 기념일이나 박정희 대통령 치하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강조하는 단문의 ‘표어 짓기’에도 번번이 채택되지 못하고, 그저 남이 써 놓은 글, 예를 들면 식목일이 되어 숲 가꾸기를 장려하는 ‘표어 짓기’에 장난기 많은 친구 녀석이 ‘산에 가서 내가 싼 똥, 산림의 자원 된다’는 등의 유치한 발상에 대해서까지 ‘햐! 그것 참 기발하다’는 말로 칭찬해 줄 만큼 나의 문장 기술 능력은 초라하고 저조하였다.

세월의 진도를 빨리하여 나의 중학교 시절로 껑충 뛰어 올라가 보자. 다행스럽게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그 때 당시에 처음으로 교육청 건물의 구석진 자리에 개설된 ‘군립 도서관’에 친구의 유혹적인 권유로 따라 다니면서 ‘달따냥’ 말고는 주인공의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는 <삼총사>라는 청소년 소설을 필두로 간신히 문자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서는 나보다 한 등급 앞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가 한 푼, 두 푼 꼼친 용돈으로 가끔씩 사들고 온 서적들(예를 들면 카알 힐티의 <잠못 이루는 이 밤을 위하여>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과 같은, 아마도 누나 자신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당시에 명문대학 출신으로 꿈 많은 여학생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엘리트 총각 선생님으로부터 일독을 권유를 받았으리라 여겨지는)을 멋도 모르고 무작정 훔쳐 억지로 읽었던 기억은 있지만 여전히 ‘글짓기’나 ‘글쓰기’에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국어 교과 시간에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비롯한 시를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문뜩 ‘나도 시인이 되어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나의 잠재적 재능이 불쑥 튀어 오른 것은 아니고 단지 그 무렵, 그 시절에는 무작정 남들이 잘하는 일은 뭐든지 따라해 보고 싶은 단순한 로망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그 날 저녁, 잠을 설치면서 한 편의 내 생애 첫 창작시를 지었고, 이튿날 국어시간에 몇 번이고 망설이던 끝에 순회지도 중, 내 옆을 지나시던 선생님께 겨우 용기를 내어 “선생님, 한 번 읽어 봐 주세요‘하고 내밀어 보았다. 아, 그 일만 떠올리면 지금도 그 때 다 마르지 않은 땀이 내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듯하다. 일언지하에 ”이것도 시라고 썼냐?”하시며 홱 던져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충격적인 사건은 결과적으로 내가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운명적인 <시인의 길>을 두 팔 벌리고 말려 준 신의 섭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본격적인 ‘글쓰기 습작’의 출발은 아마도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오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여 ‘전원시인’으로 등단해 활동하고 있는 육촌형과 함께 서울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낯 설은 곳에서 얼른 ‘촌놈 티’를 벗지 못해 적응이 수월치 않았던 서울 생활의 외로움을 탈출하기 위한 <이팔청춘의 꿈꾸는 로맨스>작전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원래 신문 연재소설에서는 관행적으로 이쯤해서 본회의 줄거리를 마치고 남은 이야기는 다음회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