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내 생각, 내 마음

금강 길 홀로 걷기 기행문 10

허니강 2014. 4. 29. 12:39

걸음아, 걸음아 나와 함께 떠나자

(금강 길 홀로 걷기 기행문 10)

강헌희

- 이쯤해서 우리는 후일에, 후손들이 걸어가야 할 길도 남겨 두어야 한다 -

어젯밤에는 찜질방에 투숙하여 충분하게 휴식을 취했다. 마치 자기 집 거실에 와 있는 것처럼 주위의 동숙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모녀가 큰소리로 밤늦도록 수다를 떨거나, 자기 집 대청마루인 것처럼 맘 놓고 크게 기침소리를 내는 감기 걸린 할아버지의 소음쯤은 이제, 어쩌다가 젊은이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 정신없이 템포가 빠르면서도 고래고래 큰 소리로 국어책 읽고 있는 듯한 청소년 풍의 최신 음악 장르에 비하면 그런대로 참아 줄만 하였다. 무엇보다도 행운이었던 것은 우레와 같은 ‘천둥 성 코골이 증후군 환자’가 내 곁의 평화선을 침범해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강경 읍내에서 <황포대교>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서는 또다시 AI 방역을 실시하고 있었다. 에고, 이미 여기저기에 무차별로 병원균 살포해 놓고 다니는 주범들은 비행기타고 전부 사방팔방으로 도망쳐 버렸는데 애꿎은 자동차들만 수난을 당하고 있구나. 쯔쯔쯧. 차라리 막강한 우리 공군 비행기를 총동원해서라도 ‘철새 놈’들 뒤쫓아 가서 가스총으로 소독약 분사해 주는 방법은 없으려나?

 

강변 둑길을 한동안 걸어 내려오다 보면 <나바위 성지>가 보인다. 이는 중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천신만고의 풍랑 길에 올라 고국의 땅으로 밀항(?)해 오신 김대건 신부님의 유적지를 뜻한다. 전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고귀하신 분을 사방이 어두워진 야밤을 틈타 고양이 발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이 땅에 발을 내딛도록 하셨을까?

다시 금강의 물과 만나 밤새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오늘 만난 강물은 어제 내가 만났던 그 강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래로 흘러오지 못하고 여전히 막혀있기 때문이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눈에 띄게 수질이 탁해 보였다. 철새들도 더러워진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은지 종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강가의 작은 물고기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강변의 웅덩이에 초봄을 맞이하려고 나온 낚시꾼들이 간간히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설령 물이 탁해 눈앞이 제대로 안 보이는데다가 그날 일진이 좀 사나워 재수 없이 걸려드는 물고기 몇 마리 쯤 건져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오염된 곳에서 잡힌 걸 가지고 자기 집 식구들에게 안심하고 매운탕 끓여 먹여도 될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강변에 놀러 와서 먹고 버린 플라스틱 빈병이 일엽편주처럼 두둥실 떠올라 유유히 흘러 내려가고 있다. 나도 그처럼 유유자적하며 둑길위로 뻗어있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내려가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마지막 종착점인 군산의 <하구둑>에 이를 것이다.

 

가다가 예쁘고 아담하게 생긴 초막집 모양의 <생태 전망대>에 올라 앉아 동양화에서 자주 보았던 아름다운 강변의 갈대밭을 바라보면서 술 한 잔 곁들여가며 시심에 젖어보는데 ‘손 전화’의 울림이 왔다. 깜박 잊고 있었던 모임 약속을 전해오는 세상의 부름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가던 길 그대로 갈까? 아니면 가던 길 멈추고 세상과의 인연을 찾아 나갈까? 나는 문뜩 떠날 때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생각해 냈다. 목표를 다 채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항상 후손들을 위하여, 후일을 위하여 남겨두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는 이쯤해서 흔쾌히 나를 반갑게 맞아 줄 세상과의 인연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음에 계속)